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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수관 죽음에 즈음하여

정보 칼럼 1

by 와정보 2013. 1. 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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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수관, 죽음에 즈음하여

 

나는 남들이 두려워 한다는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껏 네 번의 죽음을 겪고도 죽지 않고 살았는데,

그 첫째는 아주 어려서 물웅덩이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어느 어른에 의해 구출되었었고, 둘째는 달리던 기차에서 떨어져 기절 후 살아난 것과 셋째는 군에서 폭파 담당할 때 호 안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으나 죽지 않았고, 넷째는 한 반년을 입원했었던 자동차 사고로 그러했었다.

그런데 그 죽는 과정이란 것이 그저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삶이요 안 깨어나면 죽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황수관 박사가 요즘 나이론 그리 오래지 않게 살다가 갔는데, 그의 죽음을 보면 조금 허무하기도 하다. 웃으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강의도 헛되게 그리 서둘러 떠난 것도 그렇지만 그는 미션스쿨이라는 연대를 나와 그 학교에 몸을 담는 등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신심을 갖고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무개 죽은 것과 다르지 않게 죽었다.

여기에 교인들이 말한다. 하나님의 부름에 간 것이라고...

 

아무튼 하나님은 참 자리하기 좋은 신인 것 같다.

이런 죽음이든 저런 죽음이든 불평 하나 없이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이유를 붙여주니 말이다.

하긴 교인의 죽음이 어찌 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교회에 내려친 벼락이나 교회를 가던 봉고차가 뒤집혀 몰살당한 얘기는 어떻고, 정말 오래 살아야 할 이태석 신부 같은 죽음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며 감싸고도는 그 편들기는 그야말로 벌어진 입도 못 다물게 하고, 나 싫으니 돌아설밖에 라는 단절을 떠올리게 만드니 말이다.

 

죽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그저 아프리카의 어느 한 원주민이 죽던, 떼로 몰려다니던 얼룩말 하나가 죽던, 하나님과 상관 없이 정해진 시간 안에서 살다가 죽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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