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입속같은 굴 속을 뚫고나온 지하철 전동차가
마치 공룡같은 거대한 발톱을 내리 찍듯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섰다.
그러면서 VIP에 대한 극도의 의전이라도 행하려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내 앞에 서서는
첨단 무대 막이 걷히듯이
양옆으로 스르륵 문을 열었다.
나는 귀빈마냥 서둘지 않게 천천히 들어섰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빈자리가 없음을 느끼면서
두 발자국 가다가 몸을 돌려
문 바로 옆 기둥에 잔등이를 기대며
화질 나쁜 텔레비전을 보듯 잘 비취지지 않는
문에 난 사각의 유리창을 아무런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객차에 들어설 때 언뜻
유리창 반대에 있던 피사체에 대한
화면을 생각해 내는 순간
전동차가 깜깜한 터널 속으로 들어서자
고장난 티비 화면이 저절로 툭하고 잘 보이는 것처럼
그 사각의 유리창은 좋은 화질의 거울이 되어
반대편의 하얀 실루엣을 내게 또렷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거기엔,
무대 위에서 표정없이 빈 객석을 바라보는
배우같은 모습의 흰 얼굴을 한 숙녀 하나가
덤덤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게 비춰보게 하고 있었다.
백치의 미인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나는
어느새 다시 나의 눈길이 그녀를 향하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러나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상대를 인식하고는, 줄곧 나의 시선은 창문 직선의
꺽여진 저편 그녀에게로 못을 박았다.
순간 저 여인처럼 남의 이목을 끌며
남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지난 여인이
산너머 무작정 떠오르는 달처럼 떠 올랐다.
훤했던 미모와 모습을 남들이 쳐다 볼 때마다
왠지 싫지 않던 자부심에 흐믓해 하던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그녀
그러나 지금은 내게 없는 그녀..
나는 멈칫 떠오르는 기억이 싫어
물을 터는 물새처럼 고개를 젓는 순간
그때까지 가만히 인형같이 앉아있던 유리창속 그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증명사진보다는 스냅사진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는동안
새로운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교체되었던 것을 모른 내게
자기 존재를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새로 등장한 검은 옷의 한 사내가
주인공인 백치를 그만 가리고 말았다.
난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거울 속에서 다시 등장할
삐에로를 기다리는 천진한 아이처럼
화면 속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 새로 나타난 검은 실루엣이 몸을 움직여
손잡이를 바꾸는 순간 그의 옆구리 사이로
백치의 하얀 얼굴이 반짝 햇살처럼 비춰졌다.
그런데 거기에 나타난 그녀의 행동은
나를 놀랍게 만들었다.
얼굴을 앞으로 조금 내민 채
한 손으로 한 쪽 눈만 겨우 볼 수 있는 거울을 보며
다른 손의 아이펜슬로는 눈 주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손놀림은 능숙한 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 순간 그 앞을 가리던 검은 실루엣이
갑자기 펼쳐 댄 신문지로 그만 백치의 모습을
3류 극장의 끊어진 필름처럼 끊어놓고 말았다.
빨리 상영해 달라고 야유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순간,
검은 실루엣이 신문지의 다음 장을 넘기기 위해
나비의 날개처럼 접었다 펼치는 순간,
거울 속의 필름은 다시 잠깐 이어졌다 사라졌다.
그 사이
얼굴에 집중되어 있던 내 시선에
검은색 반 팔 옷에서 드러난
그녀의 포플라 나무같이 쭉 뻗은 하얀 팔이 느껴지면서,
다시 그녀의 손가락 끝에 들린 마스카라로
속눈썹이 위로 치켜 올려지는 그림이 들어왔다.
또다시 가려진 신문지로 인해 나의 눈은
그저 촛점없이 어지러이 지나가는 굴벽 어둠속에 맡긴 채
밤하늘 바람 보듯 그저 좇을 뿐이었다.
내 또렷한 시선을 의식한다면, 그 때에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스크린이 환히 밝아 졌다.
신문을 보던 검은 실루엣이 차에서 내린 것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못 보았던 시간들을 환불받으려는 심정이 되어
더욱 진지하게 화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찹쌀떡같이 동그랗게 생긴 것을 손에 꼽고는
뺨을 토닥거린 후, 눈을 이쪽 저쪽 번갈아 가며
한 쪽 눈만 겨우 보일 그 손거울로 얼굴을 탐사시켰다.
오른손은 어느새
갸름한 얼굴에서 벗어나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갈색머리 염색도 하지 않은
흑마같은 검은 머릿결을 부드럽게 코치하고는
거울 속 자기 모습에 만족한 듯이
콤팩트를 닫아 빽 속으로 떨어뜨렸다.
순간, 지우개로 지운 뒤에도 남아있던 자국처럼
지나간 여인이 수증기 피어오르듯 기억에서 다시 떠올랐다.
- 수건을 무릎위에 놓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 눈을 치켜 떴다 입을 벌렸다 하며
- 열심히 얼굴을 토닥였다.
- 드라이기를 꺼내든다.
- 오른쪽 모습
- 왼쪽 모습
-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바빴다
- 바빴다.
- 장롱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 며칠 전에 입었던 옷을 밀어놓고
- 아끼는 듯한 새 원피스를 앞가슴에 대본다.
- 속옷이 발밑에 찌그러진 도넛츠처럼 떨어졌다.
- 몸을 틀어 손을 꺾더니 쟈크를 올린다.
- 목을 빼고 다시 거울을 본다.
- 거울을 본다.
- 입을 양옆으로 살짝 찢어본다.
- 핸드백을 찾아든다.
- 미리 준비돼 있던 모양이다.
- 고개돌린 순간
- 눈길이 정전기 같이 부딪친다.
이때 날 놀라게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 정류장은 종로3가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서커스에 흠뻑 빠졌던 아이가 현실로 돌아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아쉬운 듯 혹시나 다시 삐에롤 볼 수 있을까
고개돌려 무대를 쳐다보는 마음이듯
사람들 틈에 섞여 나오면서도
눈길은 창이 아닌 현실의 백치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엔,
30분 동안 날 잊게 했던 백치미인은 사라지고
지나간 여인의 그림 위에 오버랩 된 새 여인이
야해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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