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군엘 가기 몇 달 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국민학교엘 다니는 조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애들이 떠나는 보이스카웃 캠버리에 함께 따라간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나는 조카들과 함께, 대절버스 출발지인 봉천국민학교 운동장으로 터덜터덜 무덤덤한 심정으로 들어섰습니다. 왜 무덤덤 했냐구요. 그 건 조카들에게, 평소에 잘 웃겨주고 놀아 준 공(?)으로 늘 인기 있던 이 삼촌이 군대가기 전에, 아이들의 요청에 그저 마지막으로 봉사해 준다는 맘 하나였지, 그야말로 마음에도 없는 여행에 끌려가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내 몸에는 작은 빽과 그 당시 못치면 간첩이라는 키타는 들려있었습니다.
학교 교문을 들어서자, 그런 덤덤한 내 심정을 바꿔 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싣고 갈 짐들이 운동장 가운데 집채 반만 하게 쌓여있는 옆에 유난히 눈에 띄게 서 있는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한 스물세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여자는 당시 유행하던 얼굴 반만한 잠자리 안경을 쓰고, 귀에도 계란 만한 링을 달고 있었는데, 170 가까운 키에, 손가락이 뒤쪽을 향하여 양손을 허리에 대고 있는 여자 특유의 폼재고 서 있는 모습이 일단은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선생님 맞나?' 늘씬한 몸매와 괜찮은 생김새, 좀 튀어 보이는 모습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달리 생각할 이유는 곧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절버스가 도착하고 선생님들, 학부형들과 인사도 나누기 전에 쌓인 짐들을 차에 실어야했습니다. 난 차에 올라가서 물건들을 받아 차곡차곡 맨 뒷좌석에서부터 정신없이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샌가 그 잠자리 안경의 여자가 내게 물건을 건네며 말을 붙여 왔습니다. "같이 가실 분인가요?" "...예...... " "누구 학부형이세요?" "광국이 삼촌입니다." "예..."
버스가 학교를 떠나면서 차안은 아이들 특유의 병아리장 같은 재잘거림 속에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고 난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앉자있던 나를 돌아보는 시선들과 함께 "광국이 삼춘을 소개합니다!~" 하는 소리에 놀라 보니 그 잠자리 선생이 내게 미소를 보내며 한마디 하라고 합니다. "얼떨결에 조카들 따라 갑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이들 엄마인 큰누나와 6학년, 3학년, 1학년 조카들 그리고 그 애들의 삼촌까지 낀 우리 가족 말고도 버스 안에는 남자 선생 둘, 여선생 셋, 학부형인 엄마들 다섯 그리고 학생들 약 4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태운 버스는 한 두 시간쯤 지나 도착지인 경기도 퇴계원 밤섬유원지에 개미떼 같은 아이들을 풀어놓았습니다. 헌데 오던 중간부터 내리던 비가 그야말로 엄청나게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미리 쳐놓은 차일에 짐과 사람들은 피했는데 아이들 텐트를 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일은, 텐트를 쳐본 경험이 없다는 남자 선생은 비닐을 사러 나갔고, 또 한 분의 보이스카웃 대장 선생은 다른 일을 하고, 결국 내가 그 비를 쫄딱 맞고 쳐 나갔습니다. 속 팬티까지 다 젖었으니 더 젖을 것도 없이 일만 했습니다. 머슴도 그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언제 비가 왔었느냐 싶게 아침은 맑게 개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또다시 어제 밤과 같은 머슴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밥을 하기 위해 물을 떠다 날라야 했고, 쓰레기장을 파야 했고, 무거운 짐을 날라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끝낸 후 밥을 먹고 나자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수영을 하러 간 새, 나는 남은 여자아이들을 둘러 앉혀놓고 키타를 쳐주며 재밌는 이야기로 시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벌써부터 내 호칭은 누구나가 '삼춘'이었습니다. "삼춘! 대장님이 좀 오시래요!" "어디서?" "수영할 줄 아시나 하시면서요.. " 오리새끼들 따라가듯 따라오는 여자아이들과 가보니 남자아이들을 지도해 줄 남자 선생님들이 수영을 못한다면서 그러니 내가 수영을 할 줄 알면, 물속에 들어가 아이들이 깊은데 못 들어가게 방패막이가 되 달랍니다. 여선생님 둘은 수영을 한다고 수영복을 갈아입으러 갔지만 그래도 남자가 물 속에 있어야 안심이 되겠다면서... 혹시나 하면서도 짧게 잘려진 청바지라도 잘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며 수영복 대신으로 갈아입고 강가로 가보니 으윽~, 거기엔 아까 그 잠자리선생이 수영복을 입고 또다시 그 폼을 잡고 서 있지 뭐겠습니까. 그것도 그 당시에 비키니를 입은 채 말입니다. 헌데 몸매가 죽여줍니다. 그야말로 요즈음 말마따나 쭉쭉빵빵인데, 가슴이 꼭 풍선 두 개를 넣은 것 같았습니다. 또 허리가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엉덩이에 걸친 수영복이 작아서 그런지 그 동네가 둥그렇긴 왜 또 그렇게 둥그렇습니까. 우리나라 여자들 체형 같지 않았습니다. 차마 눈길을 돌리려는 마음과 달리, 눈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사실 말이지 내 몸매도 그때는 괜찮았습니다. 좀 마르긴 했어도, 이소룡 비슷한 근육질로 남의 눈길을 받기에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잠자리 선생이 아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 보란듯이 물 속으로 들어가더니 수영을 해나갔습니다. 강 가운데로 막 나갑니다. 어제 온 비로 물살이 제법 셋습니다. 강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선생이 강을 건넌다는 현실에, 나머지 선생들과 아이들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물살이 세, 몸이 많이 떠내려가더니, 그래도 대각선으로 강 건너에 도착했습니다. 와 하는 함성 소리가 절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더니 잠시후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갑자기 모두들 나를 쳐다봅니다. 다음은 삼촌 차례입니다 하는 것처럼, 쪽팔리지 않으려면, 나는 다리에 쥐가 나도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필사즉생의 각오를 하며 강 건너를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장판교 위의 장비처럼 잠자리가 또 그 폼을 잡고 서 있습니다. 나는 경기에 앞선 선수마냥 심호흡을 하고 물에 들어가는데, 좀 긴장되고 몸이 굳은 것을 느끼긴 했으나, 어디 지금의 현실이 여율 부릴 땝니까.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데, 더군다나 남자 선생들은, 저 여자 선생의 콧대를 꺾어 주세요 하는 눈초리였고 여자들은, 여선생도 건넜는데 설마 남자가, 하는 재촉의 시간이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내 몸뚱일 강물에 던져놓고야 말았습니다. 첨벙~.. 기세 좋게 배치기로 물살을 가르며 양팔을 마구 저었습니다. 다리도 마구 요동을 쳐댔습니다. 아마 내 생전에 그렇게 지랄을 떨 듯 해 본 수영은 그것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손발을 기관차 터빈처럼 반복인 결과 얼마 안 있어 바로 잠자리가 코앞에 보였습니다. 손이 땅에 닿고, '어때 너보다 낫지..' 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세우는데, 몸에서 툭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작은 청바지 쟈크가 터진 느낌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어제 비로 인해 홀딱 젖어 벗어버린 팬티로 인해 속은 알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무 쪼인 청바지를 후회한들, 눈앞의 쭉쭉빵빵잠자리 앞에서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래도 강 건너에서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재차 힘을 과시하듯 속으로 따블을 외치며 다시 강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겨우 지친 개구리 모습을 하고 강을 건너와 바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들 수영해라, 봐 줄 테니....." 해 질 때까지 난 배꼽 밖으로 물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별이 많으면 눈물이 납니다. 너무 경이로움에 내가 작아지는 밤, 거대한 불길이 하늘을 뒤집어 놓을 듯 치솟고, 학교 학교에서 온 아 이들이 전부 모여 둥그렇게 캠파이어를 합니다. 나도 그곳에 끼어 앉아 있습니다. 사실 난 피곤하였으므로 텐트에 남아 자고 싶었는데, 나도 꼭 가야한다는 모두의 의견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어제의 삼촌이 아닌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강을 왕복한 삼손으로 말입니다. 그게 어디 힘이 남아돌아 한 짓이었겠습니까. 거기다 해가 지도록 아이들 물에 빠질까봐 물에서 나오지도 않고 봐주는 삼촌으로 인식되는 내모습, 그렇게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전체 캠파이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난 피곤에 지쳐 고갤 내리깔고 앞으로만 가고 있었습니다. "삼춘, 우리 음료수 한 잔 하고 가요.~ " 뒤따라오던 잠자리가 학부형인 수진이 엄마와 함께 내게 말했습니다. 주위를 보니 다들 가고 우리 셋만이 가고 있습니다. 피곤하니 오늘은 일찍 가서 자자는 데도 억지로 가자고 졸라댑니다. 근처 매점의 야외 테이블에 셋이 앉았습니다. 하늘은 정말 아이의 까만 눈동자같이 빠질 것 같은 매력적인 어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생 어때요? " 무심히 하늘을 보던 내게, 잠자리가 학부형에게 나를 가리키며 한 말입니다. "동생?" 나는 지기 싫어 말꼬릴 높였습니다. 잠자리가 나 보다 나이가 윌 것 같아서 난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팔씨름해서 이긴 사람이 위로하기... 요~" 아빠한테도 이긴다며 자신감을 보이는 잠자린 내 계략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수진이 엄마가 심판을 보고, 팔목을 잡아 준 나는 어렵지 않게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빠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나이는 그때까지 묻지도 않은 채, 괴상한 족보는 만들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장 선생님 말고, 다른 남선생 한 분은 음악 선생님인데, 잠자릴 좋아해 따라온 선생이라고 합니다. 헌데 이 친구, 뭐하나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귀하게 자랐는지는 몰라도, 일하는데는 꼭 빠집니다. 무거운 것 하나 들 줄을 모릅니다. 얄밉습니다. 내게 배드민턴을 칠 줄 알면 치자 하길래, 잘 치나보다 했더니 글쎄, 테니스 치듯 치지 뭡니까. 배드민턴은 손목으로 꺾어 쳐야지, 테니스 폼으로 가벼운 털 공을 쳐 대니, 그건 발레를 보는 것 같아 우습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선생은 잠자리만 좇아 다니더니, 오늘 이 자리에는 어디 갔는지 안 보입니다.
차일 주위를 뺑돌아 친 텐트에 아이들을 전부 재워놓고, 어른들만 남았습니다. 어른끼리도 놀자는 분위기였습니다. 난 자고 싶었지만 군중은 영웅을 쉬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키타를 쳐 달랍니다. 포크송에 동요에 당시에는 못치는 노래가 없었습니다. 클래식도 주문했습니다. 로망스를 전채 요리식으로 치고나니, 혹시 못칠까봐 망설이던 주문이 쏟아집니다. 레인드롭스 할 줄 아느냐, 백조의 호수,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을 아느냐 등등, 시키는 곡 모두가 내가 아는 몇 안되는 곡들만 신청해 옵니다. 말없이 할 줄 안다 모른다도 없이, 말만 나오면 손으로 답을 했습니다. 영웅은 계속 영웅이 되는 운명을 타고나나 봅니다. 아마도 그날의 별자리 운세라도 보았다면, 하늘의 영웅이 금마차를 타고 내려와...어쩌구 였을 겁니다.
그야말로 밤을 홀랑 새운 그 담날 다시 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머슴 생활은 계속 이어져 피곤한데, 각 학교별로 캠파이어를 한답니다. 대장 선생님이 나를 부릅니다. 이벤트를 한가지 해야겠는데 떠오르는 생각은 없고, 그저 아이들 모두가 삼촌을 따르니, 놀이의 사회를 봐 달랍니다. 난 궁리를 했습니다. 기왕 하는 것 좀 색다른 것이 없나 하고, 큰누나를 살짝 불렀습니다. 몇 가지를 좀 준비해 달라 하고, 텐트에 혼자 몰래 들어갔습니다. 사회자를 소개할 때 '삼춘을 소개합니다.' 하면 내가 텐트에서 나간다는 사인을 해 놓고.. 사실 나는 자라오면서 어머니, 누나들이 하던 화장을 유심히 본 적이 많았었습니다. 처음 해 본 화장이었지만 화운데이션은 물론 눈썹화장에 마스카라,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 머리엔 여자 수영모자를 쓰고, 여자원피스를 입었습니다. 팬티만 입은 채로 말입니다. 사실 내 다리가 웬만한 여자보다 못하지 않게 쭉 빠졌지 않았겠습니까?~ 내 키가 177센티미터의 키니, 빌려 입은 원피스는 내 허벅지를 다 드러내 놓았습니다. 거기에 10센티 높이의 샌들을 신었으니, 슈퍼모텔 따로 없었을 겁니다. "오늘의 사회자로 삼춘을 소개합니다.~" 밖에서 대장 선생이 나를 소개합니다. " 짠~ .." 내가 있던 텐트에 랜턴 불빛들이 모아지며, 샌들의 어색한 걸음으로 나갔을 때..한마디로 전부가 뒤집어졌습니다. 놀라고, 웃고, 이쁘다, 멋있다 하며, 사회는 보기도 전에 여자아이들이 덮치는데 깔려 브라자는 돌아가고, 난장판이 됐지 뭡니까. 모두가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역시 잠 못 잔 담날, 철수 준비에 영웅 아닌 머슴은 너무도 할 일 이 많았습니다. 땅 파 묻고, 짐 나르고, 텐트 걷어주고, 땀을 닦을 틈도 없는데, 누가 불쑥 손수건을 내밉니다. 잠자립니다. 처음 보았을 때 무게 잡던 얼굴 표정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학교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학부형들끼리 식사를 하고 헤어지려 합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청량리라고 하자, 어디 갈 데가 있는데 가는 방향이니 같이 가자고 합니다. 우리는 같이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잠자리가 그의 잠자리 안경을 손봐야 한다면서 세브란스 안경점엘 들르는데 끌려 내린 겁니다. 이미 학부형들 앞에서 날 좇아 온 깡다구는, 니가 가봤자 말잠자리 입에 든 사마귀다 하는 눈초린데 어딜 도망가겠습니까. 삼 일을 못 잔 피곤함으로 내 몸은 죽겠는데 잠자린 쌩쌩합니다. 다방에 가서야, 도저히 오늘은 피곤하니 담에 만나자 대신 그때는 내가 맥주를 사마 하는 후일의 사탕발림을 뒤로하고 헤어졌습니다.
몇 날을 잤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아무튼 잠이 깨었습니다. 그러자 제정신이 들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쭉쭉빵빵이었습니다. 당장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가 먼저 집에 가야겠다고 한 말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알려 준 학교전화로 잠자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역시 만나자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청량리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 1시간 전, 이미 머리에 떠 올렸던 물건들을 샀습니다. 그리고 잠자릴 보자마자 손을 잡고 시외버스 타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야영생활을 함께 했던 우리는 처음 본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근주자적이라고, 잠자리와 친해진 나는 아마도 메뚜기쯤 되어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먼저 출발하는 차에 무조건 올랐습니다. 목적지는 묻지도 않고 가다보니 천마산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천마산 근처에 내려 이야길 하며 한참을 걸었습니다. 내가 이야길 하면 그렇게도 맞장구를 잘 쳐주었습니다. 그는 선생님답게 상식도 풍부했습니다. 좋은 풀밭을 찾아 준비물을 펼쳤습니다. 돗자리보다는 천의 감촉이 좋아, 어머니에게 혼날 각오를 하고 준비해 온 홑이불 보를 깔았습니다. 그 위에, 만나기 전에 시장 보아온 통닭과 과일을 꺼냈습니다. 와인도 한 병 준비했습니다. 괜찮은 와인 잔 두 개도 사왔습니다. 잠자리 눈이 둥그래집니다. 그 놀라워 해주는 모습에 난 신이 납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하는데 문득 걱정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친하게 지낼 줄은 몰랐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큰누나에게 물어보니 잠자린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위였습니다. 거기다가 내게 "군대 갔다 왔죠!" 하는 물음에 '[에이 오빤데 뭘, 또 언제 보랴.. ]....응.' 했던 거짓말이 영 찜찜함으로 남았습니다.
둘인 기차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오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창동쯤인가에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다른 열차가 탈선을 해서 대기중이랍니다. 큰일 났습니다. 청량리에 도착하니 거기서 잠자리 집까지 가는 마지막 버스가 통금시간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작별을 하고 버스에 올라타던 잠자리가 갑자기 되돌아 내게 달려 내려왔습니다. 혼자는 못 가겠다고 말입니다. 자기를 바래다 줘야 한답니다. 승강이를 하는 동안 버스가 마술 부리듯 사라졌습니다. 잠자리가 오히려 내게 힐책합니다. 책임지라면서... 정말이지 이 대목부터는 난 참 쑥맥이었드랬습니다. 여자 혼자 어떻게 여관엘 들어가느냐는 잠자리 최면에 걸려 결국은 눈앞에 있는 여관엘 끌려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난생처음 들어가 보는 여관입니다. 지금처럼 좋은 시설이 아니었고 좀 후진 곳이었습니다. 로마의 휴일처럼 반을 갈라 벽에 기댄 채, 난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잠자린 여기서도 장비 모습 그대롭니다. 나는 잡혀 온 참새처럼 떨었습니다. 불을 끄면 내 떠는 모습을 감출 것 같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부스럭 소리가 나면서 불이 켜졌습니다. 나는 차마 눈을 못 뜨고 있었습니다. 쭉쭉빵빵한 모습이 보일까 봐 더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내 어깨를 흔들며 나를 불렀습니다. " 나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는 소리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못이기는 척하며 일어나 첨병처럼 화장실을 확인해다가, 엄청 난 사실을 알려라도 주는 듯이 가리켜 주고는, 혼자 앉아, 내 속에서 울려대는 징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많이 다친 것 알아요?" 방을 들어 선 잠자리가 내게 동정심을 유발시켰습니다. " ......" " 먼저 번 밤섬에서 수영할 때요..." " 그때 왜? " " 강 건너 설 때 시멘트 턱에 긁혔어요." 나는 앉은 상태이고 잠자린 서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가 청바지 쟉크를 거침없이 내렸습니다. 이미 상처를 확인 시켜준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 둥그런 부분을 내 앞에서 이렇게 쉽게 내릴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흰색 삼각팬티 라인이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꼴..깍~.." "여기 좀 보세요.~" 허리 바로 밑 골반 뼈 부근이 화투짝 만하게 긁혀, 급정거한 타이어 바퀴자국 같은 딱지가 있었습니다. 멋진 폼 뒤에는 저런 쓰라린 아픔이 있는거구나를 느끼면서.. "어유 저런~" 말은 위로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난 분명 떨고 있었습니다. 내가 싱겁게 보고만 있어서 그랬는지 그가 다시 쟉크를 올렸습니다. 아마도 항복하는 맘으로 성문(城門)을 열어 주었는데도, 못 들어오는 약장(弱將)에겐 성을 내 줄 수는 없다 하는 행동 같았습니다. 아쉽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담날 아침 여관문을 나설 때, 잠자린 벌레씹은 표정이었고, 나는 주눅든 표정이었습니다.
그 후 그래도 둘은 자주 만났습니다. 이제 잠자리의 행동은 누가 봐도 내 앤, 그것이었습니다. 만나면 의례 끼는 팔짱은 늘 내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팔에서 느껴지는 그의 쭉쭉빵빵한 느낌이 어디 장난이었겠습니까.~
그러던 중 어느 날, 당시 데이트 코스의 기본인 남산 도서관, 식물원을 거쳐 팔각정에 이르는 대장정을 답사했으니, 그 많은 시간들 속에 무슨 이야긴들 안나왔겠습니까. 그 때 마침 군대 얘기도 나왔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때다 싶어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 저 사실... 나... 군대.....갔다 오지 않았어..요.." "...................." 말 안 하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아주 나온 김에 나이까지도 털어놓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매 맞고 난 놈 다리 펴고 잔다는 생각이 그걸 부추겼습니다. "나이도 경혜보담 두 살 아래고....요.." "..............................................." 입 쟉크가 고장 났나 봅니다. 내리질 않습니다. "..............................................." 자기 가슴이 보일지, 신발이 보일지 모를 고개숙임으로 한동안 을 걷던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음.. 우리반에 ...희진이란 아이 부모가 계신데..그 애 아빠가 그 애 엄마보담 두 살 아래래요... 그래도 아주 잘 살드라고?.."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나는 게거품을 물고 속았다며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가 빠를 줄은 미쳐 몰랐던 것입니다. 나는 대답대신 작은 눈을 크게 뜨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말을 놓았고 그녀는 말을 높였습니다. 어느날 쭉쭉빵빵이 빽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보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진이었는데, 조그만 증명 사진이 아니라 그녀의 미니스커트 입은 정장의 전신 사진이었습니다. "이게 뭔 사진인데?" "응, 그거는 자기 갖고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래 해..." "나 스튜어디스 시험 보려구요." "응?.. 스튜어디스? " 갑작스런 단어에 놀라 물었습니다. "그럼 학교는 어떡허구?" "그거야 당연히 합격하면 그만 둬야지요." 학교에 출근하기 전, 일어가 딸려 학원엘 갔다가 출근한다는 그녀는 시험에 자신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 직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준 책이 생각 나 반대했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시험도 같이 보러 다녔습니다.
원서를 사러 창덕여중엘 가는 도중, 종로경찰서 앞을 둘이 손잡고 건너는데,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법 횡단을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먼저 건너 튀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동차 사이를 헤치고 건넜고, 나는 중앙선에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혼자 끌려갈 생각이었습니다. 역시 정복 입은 순경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건너와 파출소에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도 다시 건너와 파출소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나두 같이 있을래요!" "먼저 가라니까..!" 나는 무슨 독립군이라도 피신시키려는 양 그녀를 보내려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자 순경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 이 사람 장발 단속에 걸린 겁니다." " 윽...~ " 경찰서 구내 이발소에서 미리 2천원을 내고 순서대로 깎고 나가 라는 것을 그녀와 눈을 맞춰 튀었습니다. 이번엔 걸리지 않았습니다. 골목에서 둘인, 마주보며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안 깎은 머리라도 돈은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그녀는 JAL에 합격을 하여 홍콩에 연수를 받으러 떠났고, 나는 빡빡머리로 논산으로 떠났습니다. 입영열차 안에서 그녀가 생각났습니다. 지난 밤, 이미 그의 쭉쭉빵빵한 몸에 마술 걸린 내 몸은 그의 최면에 너무 쉽게 걸려, 눈앞의 여관엘 다시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이유는 역시 너무 늦어, 여자 혼자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관엘 들어서면서 나는 먼저보다는 호기 있게 말했습니다. "화장실 있는 방으로 주세요." 그녀는 아무말 없이 내 가슴에 기대 왔습니다. 이제 방 안에는 경계선 같은 것은 없어졌습니다. 누워서도 계속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군대 안 가면 안돼요?" 국민의 사대의무를 모를 리 없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그의 벗은 몸을 감싸 안은 팔에 힘주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그런 밤을 하얗게 지새웠습니다. 나의 동정인 그녀와의 그날 밤은 그렇게 추억으로 남겨진 채, 입영열차의 차창 밖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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