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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동이족에 관한 글과 그 글에 대한 나의 소고

정보 칼럼 1

by 와정보 2005. 7. 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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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박성일] <역바찾>-1-시조와 동이족

얼마 전 어느 동호회에서의 대화도중 우리의 상고사 얘기가 나왔습니다.
평소 역사 얘길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그 날 이 얘기 저 얘기 많이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들어서 찜찜하던 차에
문득 이 이야기를 게시판에 올려 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결과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딱히 관심이 가는 얘기가 아닌 줄은 압니다.
하지만 100명 중 단 한 명이라도 읽고 우리의 자긍심 깨우는데 도움이
된다면 보람으로 알고 기쁘게 올리겠습니다.

<역바찾> = 역사 바로 찾기

남산 자락에서 박성일 올림

<역바찾> 1. 시조
1-1. 한인과 한웅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시조를 단군이라고 알고 있으며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배워 온 바가 그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것은 분명히 일본의 흉계에 세뇌 된 우리들의 오류인 것이다.
일본은 한국강점 후 치밀하게 매우 치밀하게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혼신을 다 했었다.
우리의 고대문헌을 15년간이나 강제수거(말이 15년이지 우리가 15살
때부터 30이 되기까지, 혹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원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집에 소장한 옛 문헌이 발견되면 극형에 처한다고 위협하여 빼
앗고 문헌이 있을만한 곳은 강제수색을 하며 한편으론 회유를 통한 자
진신고를 유도했다면 생각해 보라 강토 어느 구석에 옛 자료가 남아
있겠는가..)한 후 증빙자료가 더 이상은 없다고 확신되어질 때 역사
변조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만년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를 반 이상 줄여 단군을 시조로 만
들고 곰의 자식이라는 신화까지 교묘히 조작하여 민족의 정기를 기본
적으로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바이칼호에서 오늘의 중국대륙을 망라하고 있었던 우리의 강토
를 한반도 안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실지로 우리의 국경 압록강과 두만강은 일본과 중국이 만주철도부설
권을 놓고 임의로 합의한 탁상조약에 불과한 것이다.
그 조작한 국경 너머에는 만주가 있다.
만주가 어디 호남평야만한 벌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 간도가 여의
도 되는 두만강 가 샛강 건너 섬이라고 생각하는가 ?
한반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이 그 곳에 있다.
우리의 땅인 것이다.
만주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땅이었다.
지금 그 곳에 누가 살고 있는가...우리의 민족이다.
누구보다도 중국이 그 곳이 우리의 땅임과 자신들의 영역 밖임을 잘
알고 있음이니 어쩔 수 없이 조선족자치구란 이름으로 표면적으론 우
리민족의 자결을 인정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비통한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는 일제와 그 하수인 무리들의 조작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군 이전에 이미 한인시대(한국시대) 3301년,
한웅시대(신시시대) 156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世界最古의 역사민족
이다.
도합 5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미 단군 이전에...
이는 중국이란 나라가 생기기도 전에 天國이란 나라를 이루고 있었음
으니 천국이라함은 天族의 나라이기 때문에 黃土人(우리가 당시의 중
국인을 가리키던 말)들은 우리나라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선민(選民:하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얘기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부를 것도 없이 황토인들 자신이 천민의 나라,
즉 천국이라 부르고 있었다.(후에 14대 한웅(자오지한웅:치우천왕)때에
이르러서야 중국은 헌원이 치우천왕과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세운다.
유명한 탁록전투가 그 때의 전쟁이다.
헌원은 단 한 번도 전쟁에 이기지 못했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황토인의
결속이 다져지고 그 것이 중국 최초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기반이 된다.)
중국이 나라를 세운 후에 우리를 부르는 그들의 호칭이 바뀌었다.

1-2. 동이족
새로운 호칭은 동이족(東夷族).
옥편에 보면 여기 나오는 "夷"를 오랑캐 "이"자라고 버젓이 밝히고 있
다.
이 또한 제살깎기식 망언이 아닐 수 없다.
동이족의 "이"자는 클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합쳐진 자이다.
기회포착과 새치기에 능한 우리가 숏트랙에서 진가를 발휘하듯, 우리의
양궁이 세계를 휩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큰 활을 잘 쏘는 동쪽 민족, 즉 東夷族이란 우리에 대한
중국인들의 두려움과 경외심이 다분히 어린 표현인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중국인들이 섬기는 신(神), 곧 삼황오제는 모조리 동이족
이다.
"태호복희"(중국의 신화적 시조. 삼황중의 1황. 우리의 5대한웅 "태우의
한웅"의 12 아들 중 막내아들이란 기록이 있다.)가 그렇고 "염제신
농"(중국의 초대 부족국가를 이룬 인물. 삼황중의 2황. 한국(신시)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씨의 후예란 기록이 있다.)이 그렇고 "황제헌원"(중국
의 초대황제. 삼황중의 3황. 갈홍(葛弘)의 포박자(抱朴子)에
의하면 "황제(헌원)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치우천
왕 시절의 동이선인)을 만나 사사를 받고 만신을 부르고 부렸다"고 하
였으니 동이족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사마천의 "사기"는 삼황오제가 이름과 나라만 다를 뿐 한 성
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고
"치우천왕"(신시시대 14대한웅. 우습지 않은가 우리의 한웅이 저들의 신
인 것이다.)이 그렇다.
우리의 역사를 볼 때 지금도 잘(?)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의 국장 얘기다.
그 문양이 봉황문이란 점이 그나마 우리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깨우치고
있단 얘기다.
무궁화대훈장이 봉황문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청와대 접견실 등이 가
끔 TV화면에 나올 때 뒤에 보이는 휘장이 봉황문이다.
옛부터 동양의 상징동물 중 봉황은 동이의 상징이었고 용은 중국의 상징
이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중국의 삼황오제 기사에는 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봉황이 자주 등장한다.
(봉황(鳳凰):봉황이 한 마리의 새가 아니라 봉(鳳)은 수컷이요 황(凰)
은 암컷이다.)
이는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이니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역바찾-1>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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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 대한 나(정보)의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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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과 우익은 늘 대립하며 살지만 사실은 모두가 그 나라 사람들인 것이다. 다만  치우친 경향이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는가 하는 점에 따라 결정지어 놓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라를 편들면 우익이요, 나라에 반하면 좌익으로 칭하는데 아무튼 윗 글에서의 느낌은 왜 우익이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만드는 것일까....~

   歷史를 말하는데는 천착(穿鑿)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징(明徵)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에 글쓴이의 소이(所以)는 모르겠으나 역사란 다시 말해서, 어느 우국지사의 충정어린 소설처럼 쓰여져서도 아니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글 쓰는 소재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자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유적 소재를 놓고 그 내용을 누가 인정하는냐가 문제인 것인데, 사실 요즈음은 예전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며 사는 시대이기에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전문가 버금가는 이론이 인터넷 각 게시판마다 펼치지는 시대이기도 하다보니, 내용을 떠나 목소리 큰사람이 막 싸움엔 이긴다듯이 전문가보다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경향도 많다.

   이에 비전문가들의 무조건적인 우익적 발상의 혼돈보다는, 한 분야의 지식 꼭대기에, 즉 정통 학계에 있는 권위 있는 사람들의 논문을 인지 하는 것이 옳바른 일이 아닐까 하는 뜻으로 윗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논문의 글들 발췌하여 표현해 본다.

   * 조혜정 (연세대 사학과 졸, 미국 미주리 대학교와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에서 문화 인류학으로 석, 박사학위 받음. 1979년 귀국하여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강의해 왔고, 현재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의 논문 중에서 좀 길지만 일 부분을 인용해 본다. 지루하더라도 타자치는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라도 한 번 읽어주길 바라는 것은... 그래도 우리 역사이니...

   "...식민지적 지배 담론에 대한 저항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최남선, 이능화, 손진태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아끼바 류의 식민 담론에 대항하는 대항 담론을 만들어 갔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식민지 사회의 문화적 자주성을 부정하는 아끼바 류의 식민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한 논의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대항 담론을 만들어 가고자 한 시도를 살펴보자.
   일제하 문화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를 한 마이클 로빈슨은 민족의 주체성 형성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한 역할을 1920년 대 논쟁에 초점을 두어 정리한 바 있다. 그는 1920년대부터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사회주의 노선의 공식 기록물로부터 민족사를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특히 최남선은 고대사와 신화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국가 기원과 정치적 자주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이론으로 일본의 '동화주의' 노선에 맞서려 했음을 밝혀 내고 있다. 조선의 역
사를 장기적으로 동화주의적 목적에 맞추어 해석하고자 한
일제의 공식적인 노력이 오히려 조선의 역사와 민족, 그리고 종교 등에 대한 민족주의적 연구를 자극하였고 이 과정에서 최남선은 조선을 동아시아 역사의 선두로 규정하고 단군 신화로부터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와 그 중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돈희와 제널리 역시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이 조선 문화의 독자적인 기원과 발전을 의도적으로 찾는 작업을 통해서 대항 담론을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면서 최남선의 불함 문화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최남선은 태양과 천신 신앙의 공통 문화권을 불함 문화권으로 보고 오끼나와, 한국, 일본, 동북부 중국 몽고로부터 중앙아시아 발칸 반도까지 걸치는 방대한 문화 영역에서 조선을 불함 신앙 문화의 전형적 경우로 상정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같은 문화적 뿌리'를 강조한 당시 식민 담론, 곧 일선 동조론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논리이다. 최남선은 더 나아가 단군을 조선 민족의 시조로 상정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 문화와 별개로 존재해 온 조선 문화의 고유성과 역사적 깊이를 드러내고, 문화권의 중심을 조선에 둠으로써 일본을 주변화 하고자 '야심'을 갖는다. 그는 주체성을 잃어가는 민족을 다시 모으는 구심점으로 단군과 무속을 선택했던 것이며, 실제로 단군 교회를 창안하여 정기적인 대중 집회를 통해서 천황이 아닌 '진정한 민족의 국조' 단군에 대한 신앙을 드높이려 했다고 한다...."

   * 김성례 (무속 전통의 담론 분석-한국문화 인류학 제 22집) 인용...
   "단군 신화는 고려말 왕조가 원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상태에서도 부각되었었다. 일연이 구전되어 오던 설화를 한민족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서에 올림으로 공식화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동이족에 대한 설명은 일부분 나 역시도 수긍하고싶은 바이다. 그 것은 우리가 중국 한자를 배워올 때 우리식 해석은 전혀 배제한 채 사대주의에 물든 중국식의 해석 그대로를 답습한 결
과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김용옥 교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전통적으로 우리 글이 우리의 삶을 잘 표현해 내는 글이 아니었음을 '한문의 자기말화'의 측면에서 풀어낸 바 있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문을 의미로 풀어 읽어 냄으로(훈독 訓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문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간 반면 조선조 지식인들은 한문을 소리로만 읽어 냄으로써(음독 音讀) 문자를 생활화하는데 상당한 한계를 안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하 생략...

   추서 : 이런 내용을 토론하다 보면, 위 문인들 중 왜 그들이 친일을 했는가에 대해서 또 다른 토론의 여지가 있겠지만은 본문의 주제와 다르기에 지면상 여기서는 끝내기로 한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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