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일기
불면(不眠)
들키면 안 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밤새도록
비가 내리면
예민한 범종 귀는
밤새워 열려
빗소리 노랫소리
구분할 줄 모르고
언제였던가
덤벼 든 하얀 새벽
걸지도 않은 빗장
속눈썹 스스로 열어
일기 6월 10일 맑음
몸을 담궈 준 하늘이
홍천 계곡 물처럼 맑다
바람은 어제완 달리
당김 없이 뽀송 하다
그래선지 나뭇잎 역시
연푸름을 버리고
짙푸름으로 가고 있다
결혼 소식이란 귀걸일
오늘도 떼어내지 못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난 과거가
삼류 영화관 스크린처럼
또렷하지 않게 스쳐간다
얼마나 되었을까
푸름에 빠진 몸을 인식하곤
진저리로 과거를 털었다
어느새 내려가는 계단이
발 밑에 딸려 온다
발아(發芽)
꾹꾹
단감을 먹다가
뱉어 논 씨앗
장난삼아 빈 화분에
눌러 놓은 건데
한 달쯤 지났을까
애기 손 같은 싹이
세상 궁금한 지
얼굴을 내밀었다
그로부터 두 달
얼룩송아지처럼
벌써 그 씨 아니랄까
감나무 흉낼 낸다
흐린 날
온통 적신 몸
하늘이 벼루
불타고 남은
가슴은 잿빛
먹물 갈아라
먼 산 그리게
도시 개구리
그 어디서 왔을까
외로이 떠는 부름
빛도 없는 밤 하늘
내 방 불빛을 따라
창가에 붙은 자객
너는 남이야
어울리지 않는 타인
왕따가 찾는 멘토처럼
나를 불러내려고
떨흙 숨어 신호 해
심보
탄생을 보면 슬퍼져
장례식 가면 웃음도 나고
이혼 얘길 들으면 재밌기도 하지
무슨 심보일까
죽음
화려한 죽음은 없다
쓸쓸한 죽음도 없다
사라져 가는 데는
그 혼자만 가는 것
은유 시
선종禪宗 같은 시를 치는 것도 아니지만
은유 없이 문장만 수려한 시도 아닌 건
조미료 친 음식처럼 순간 맛있긴 해도
뒷맛을 남기는 된장 같은 맛은 안 나
인생의 가치
향기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듯이
떡히 알기 힘든
인생의 가치 역시
벌 나비처럼
그 향기를 찾고자
무던히 노력할 때
가치를 찾게 되리라
부럼은 깼을까
땅콩을 먹고 난 자리처럼
흔적 남은 과거가
미래와 닿은 지금 이 시간
속 깊이 너희들을 묻고
대보름 오늘도
깨트릴 호두껍데기는
오래된 실타래처럼
묵은 때가 짙게 타 있다
한계
지나는 새야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도사 어깨 위 무게는 가벼워라
나는 내 밥 숟가락에 얹힌
남의 시선도 돌만큼 무거운데
가부좌 틀고 앉기만 하면 도사되랴
수목장
나 죽으면
아무 산 웬만한 나무 밑에
내 뼈 가루 묻고
적당한 세월이면
썩어 없어질 나무 팻말 하나에
이렇게 써 줬으면
“시인, 정보井甫 이 곳에 소풍 오다.”
주해 :
나는 사후 세계라는 말도 믿지 않지만
죽어서도 끝까지 차지하려고만 하는
땅이며, 만년을 가도 없어지지 않을 비명碑銘 등에 대한
인간들의 욕심에 대해 혐오하는 사람이다.
인간!
자연에서 돌아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